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천재적인 사기꾼 마르케스와 마르세이유 출신의 천재적인 그림의 복제 기술을 지니고 있는 이브쇼트롱의 두 사람은 스페인의 명화를 복제하여 이를 파리의 사교계를 통해 마치 원작의 도난품으로 속여 거액의 돈을 벌었다.
마르케스가 이번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그림 ‘모나리자’(1503-05)의 복제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무려 6장이나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부탁을 받은 이브쇼트롱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법에 관한 자료를 헌책방에서 사 모았는데 그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화법에 관한 것도 있었다.
다빈치의 유화의 패널은 먼저 유향수지와 테레빈 유 그리고 납 성분과 석회가 섞인 약품을 바르고, 이어서 알코올과 비소 혹은 수은과 염화물을 바른 다음 마지막으로 잘 정제하여 끓인 기름을 바르는데 이 약품들을 바를 때마다 중간 중간에 니스와 흰색 납을 칠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일단 패널의 표면이 완성되면 패널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기름기를 빼기 위해 소변으로 한 번 닦아 내고는 미색 종이처럼 보일 때까지 갈고 또 갈아서 사용하였다는 기법을 그대로 따랐다.
오래돼 낡은 그림에는 가는 거미줄 같은 갈라진 균열이 있는데 실은 이 균열이 그림의 연대나 진위(眞僞)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신경 썼다는 것이다.
이브쇼트롬은 그림위에다 투명한 니스를 이중으로 칠하는데 밑층에는 지건성(遲乾性)의 느리게 마르는 니스를 칠하고 윗층에는 속건성(速乾性)의 빠르게 마르는 니스를 칠하고 패널을 선풍기로 말리면 니스의 두 층은 서로 다른 마르는 속도 때문에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생기며 이 균열에다 솜에 먼지를 묻혀 가볍게 두드려 낡은 옛 그림으로 둔갑 시켰다는 것이다.
그림 모작에 대한 수배를 끝낸 마르케스는 ‘모나리자’그림을 박물관에서 훔쳐 낼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 매일 같이 박물관을 출입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다가 이탈리아 출신의 고용직노무자 빈센초 페루지아와 란체로티 형제의 세 명을 알게 되어 이들과 사귀면서 그림을 훔치는 일에 참여할 것을 종용해 본바 돈만 많이 생기는 일이라면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에 이들은 자주 만나 몇 번이고 그림을 훔치는 리허설을 하고 알리바이도 완벽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만일을 위해 자기의 본명이나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실은 1910년 말 루브르 박물관은 전시된 예술품이 파손되는 일이 빈번하게 야기되기 때문에 박물관의 관리자는 오랜 논란을 거친 후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작품에는 보호유리를 설치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당연히 ‘모나리자’도 보호 대상 작품에 포함되었는데, 페루지다는 작품 보호용 케이스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란체로티 형제는 페루지아의 소개로 박물관의 노무자로 일하게 되었다.
다른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루브르에서도 미술생들에게 작품에 대한 모방을 허용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미해서 원본과 크기가 다른 복사화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복사화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창고 하나를 별도로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이들 하수인들은 기회를 노리다가 월요일에는 박물관이 관람객을 받지 않고 작품의 재배치, 파손된 부분의 보수 등으로 직원들만이 출근하게 되어있는 점을 노려서 일요일인 1911년 8월 20일 저녁, 페루지아와 동료들은 바로 그 보관창고에 숨어들었다. 이 창고에서 밤을 지낸 그들은 월요일 아침 일찍,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요즘처럼 삼엄하지 않았던 당시의 보안 상태를 틈타 페루지아 일당은 너무나도 쉽게 ‘모나리자’를 카레 전시실에서 떼어낼 수 있었고, 운 좋게도 그림을 박물관 바깥으로 가지고 나오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박물관에서 가장 아끼던 그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림이 없어진지 27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렇지만 관내 어디에 있을 것으로만 여기고 도난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관내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허사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사진 촬영이나 검사를 위해 사전연락 없이 그림을 전시실에서 때어내는 일이 흔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림을 훔치는데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마루케스는 기뻐했으며 훔친 그림을 확인하고는 약속한대로 그 하수인 세 사람에게는 각각 거금의 돈을 건네고는 그림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페루지아 더러 보관하라고 지시 하였다. 그래서 목수일의 솜씨가 능한 페루지아는 커다란 가방을 개조해서 가방 밑을 두 층으로 개조하여 밖에서는 밑층이 없는 것같이 보이게 하고 그곳에다 ‘모나리자’를 숨겨 놓았다.
한편 1911년 8월 22일 그림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파리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 전체가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 프랑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상상할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과 같은 표현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피가로>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라 요콩드’가 없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재수 없는 농담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고, 어쩌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간직했던 그녀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사고로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처럼 후회 속에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다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마르케스는 그 여섯 점의 복제품을 미리 확보해 둔 고객들에게 진품이라 속여서 팔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 여섯 명의 고객은 북미 지역에 다섯 명, 그리고 남미에 한 명이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마르케스는 한 달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한편 루브르가 문을 다시 열리자 파리 시민들은 카레 전시실로 몰려갔지만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름 없는 관객이 갖다 놓은 꽃다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 심술궂은 기자는 그때 몰려든 사람들은 이전에는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단지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이라고 비꼬았다.
도난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소문도 무성했고 온갖 억측들이 난무했다. 당시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독일이 이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주장까지 나돌 지경이었다.
그림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주겠다는 광고가 나오고, 그림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술사나 초능력자에게 5천 프랑의 거금을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1912년 봄에 이르러서는 모든 파리 시민들은 ‘모나리자’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여론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그해의 사순절 행사에서는 비행기에 실린 모나리자가 루브르 앞에서 하늘로 날아 가버리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라 요콩드’가 걸려 있던 카레 전시실의 벽을 1년이 넘게 비워두고 있던 루브르의 관리 책임자도 결국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 자리에 라파엘로(Sanzio di Urbino Raffaelo 1483-1520)의 ‘궁정인 카스틸리오네의 초상’(1514-15)이라는 그림으로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