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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 Crime] 그림도둑이 국민적 영웅이 돼

김은식 기자 | 기사입력 2014/03/24 [08:17]

[Painting & Crime] 그림도둑이 국민적 영웅이 돼

김은식 기자 | 입력 : 2014/03/24 [08:17]
한달 후에는 돌아온다던 마르케스는 석 달이 넘어도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에 경찰은 루브르 박물관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수사를 하면서 페르지아나 란체로티 형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사를 받았으며 가택수색까지 받았으나 무난히 넘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장차 도난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즉 장물아비에게 팔아넘길 것인지 아니면 루브르 당국과 교섭하여 그림 값을 받아낼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어 조바심이 가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으로 간 마르케스는 뉴욕의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미리 예약되었던 복제 '모나리자'의 매매에 나서 1장에 30만 불식 6장 모두 180만 불(현 시가로는 1800만 불, 한화로는 약 220억 원에 해당)에 처분하였다. 이렇게 거금을 손에 쥔 마르케스의 계획은 장물을 처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케스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경찰의 손이 미치지 않는 북 아프리카의 휴양지로 가 편히 살기로 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페르지아는 나날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못해 괘씸한 생각이 들어 마르케스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져 급기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13년 12월 초에 피렌체의 고미술상(古美術商) 제리에게 "나폴레옹이 약탈 해갔던 '모나리자'를 되찾아 갖고 있으니 감정을 부탁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즉 페르지아는 '모나리자'를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약탈해 갔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고미술상 제리는 장난편지로 생각하고 간단하게 "그림의 감정이라면 피렌체 미술관장을 만나 보는 것이 좋겠다"고 회신 하였다.
그랬더니 정말로 레오나르도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애국심에서 '모나리자'를 훔쳐 냈으며 그림은 현재 호텔에 갖고 왔으니 의향이 있으면 내일 호텔로 와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음날 제리는 미술관장과 함께 호텔로 페르지아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정부가 그들에게 그림의 값이나 구입여부를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페르지아는 가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환영 하였으며 그림을 팔 목적으로 훔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위해 약탈되었던 것을 반환하기 위해 갖고 왔다며 가방의 이중 장치를 떼고 그림을 꺼내 그들 앞에 내놓았다.

흥분된 두 사람은 그림을 갖고 미술관에 가서 그전에 루브르에 가서 '모나리자'를 근접 촬영하여 놓았던 사진과 대조하고 그림의 세부를 감정한 결과 진품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대기 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신호를 보내 페르지아는 체포되었다.
세계의 모든 나라의 신문은 이 사실을 톱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며 체포된 페르지아는 조국을 위해 공헌하려 한 의거인데 감사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자기를 체포한 것에 대단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하였으며 반환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각 중요도시에서 공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전시회가 열리자 시민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으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전시장은 수라장이 될 정도이었다.
시민들은 페르지아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그를 국민적인 영웅이라 외치며 그가 구속되어 있는 감옥에 면회를 청하고 꽃다발을 보내고 술과 담배 등을 매일같이 그에게 보내와 페르지아는 처음과는 달리 매우 흐뭇해했다.

카사블랑카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마르케스는 페르지아의 배반임을 알게 되었으나 페르지아가 단독범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로 자기의 신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동기야 어찌 되었던 간에 페르지아가 '모나리자'를 피렌체에 갖고 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광을 재차 세계만방에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며 사건의 진상을 밝히거나 그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경향이어서 재판은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법정에서 페르지아는 자신이 '모나리자'를 훔친 것은 애국심으로 한 짓이며 사리사욕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 역설하였다.
또 변호사는 "이탈리아 국민은 누구하나 피고를 처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피고가 석방되면 전 국민은 그를 영웅으로 환호할 것이라"는 간곡한 변론이 통해 최종적으로 페르지아는 징역 7개월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판결이었는데 그가 체포되어 7개월 9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1914년 7월 29일에 석방되었다.
이탈리아 국민은 작품이 자기 나라에 돌아온 것에 대해 기뻐하였으나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줘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사건을 통해 두 나라는 문화적 유대를 더욱더 곤고히 할 수 있었다.

작품의 반환을 앞두고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아주 거창한 전시회를 열기로 했는데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첫날인 12월 14일에는 약 3만여 명이 몰려들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국외유출 문화유산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이었으며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의 전시를 끝으로 '모나리자'는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는데 전시회마다 시민들의 반응은 거의 광적이었다.

1913년이 끝나갈 무렵 다시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돌아온 '모나리자'는 새해 며칠 동안은 파리의 국립예술학교에서 전시되었으며 전시회의 입장 수익은 모두 이탈리아의 자선기관에 기부되었다.

'모나리자'는 그 후 1월 4일에는 마침내 감동에 찬 행사와 더불어 루브르의 카레 전시실의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자 2일 동안에 무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작품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루브르를 찾았으며, 돌아온 모나리자를 찬양하는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이렇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계속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 차례의 도난 사건과 이듬해의 제1차 세계대전 으로 '모나리자'를 찬미했던 예술가와 작가, 지식인 계층은 이 전 만큼 그 작품을 우러러보지 않았다.

이는 도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웃지 못 할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쟁 후 새로 등장한 사조인 다다이즘(Dadaism)과 미래파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예술 전체의 '사회적으로 신성시되는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우상 파괴적 경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는 마르셀 뒤상(Marcel Duchamp 1887~1968)이 제작한 'LHOOQ 복제'(1919)라는 작품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모나리자'의 싸구려 복제화에 수염을 그려 넣고 LHOOQ 라는 글씨를 써넣었다.

아무 뜻도 없는 것 같은 그 글씨를 소리 내서 읽으면 불어로 '그녀는 끝내주는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뜻이 된다. 작품 속 여인의 자세에 대해서도 그 동안 말들이 많았지만, 뒤상은 글 중에서도 성적인 모호함에 집중했던 것이다.

1924년 페르나드 레제(Fernand Leger 1887-1955) 는"전 세계 사람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모나리자'가 그려졌던 16세기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적인 정점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큼 큰 실수도 없다..."라는 말로 당시 예술가들의 감정을 대변했다.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는 6년 후 '조콘다와 열쇠'(1930)라는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 작품에서는 근대의 기능적인 미를 대표하는 열쇠뭉치가 '조콘다'의 '퇴폐미' 나란히 놓여 있으며 작품을 더 깎아내리는 의도로 정어리 통조림까지 그려 넣었다.
이렇듯 '나리자' 그 도난사건을 둘러싸고 희비가 몇 번이고 엇갈리는 회화사상 보기 드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문국진 박사,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법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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