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연애편지」가 사라졌다. 의적 ‘틸’을 자처한 청년이 범인임을 주장하면서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명화 「연애편지」의 절도사건.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은 다른 나라의 국립미술관과 같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세계적인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자기네 나라의 미술 작품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회화 부분에 있어서는 15세기에서 17세기의 작품을 주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그것은 17세기가 네덜란드 국력의 황금 시대였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기에 렘브란트를 위시한 여러 명의 거장이 출현하여 세계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 모두 네덜란드 회화의 발전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 전시하고 있다. 당시 거장들의 그림은 그 크기가 상당히 커서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야경 (1642)」은 세로 359cm, 가로 438cm로서 그의 그림에 대한 정열과 의지가 강했던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으며, 특히 강한 명암이 대비와 뒤에서 앞으로 향함에 따라 점점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 이 그림을 한참 보고 있노라면 그림의 사람들이 관람자를 향해 걸어 나오는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 그렇그런가 하면 런던의 그리니치 카레지 회화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렘브란트의 「야코브 데 헤인 3세」같은, 29.9 x 24.5 cm2 정도로 작은 크기의 작품도 있다. 왜 여기서 그림의 크기를 논하는가 하면 그림의 크기가 아주 큰 것은 도둑들의 목표물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훔쳐내기도 힘들지만 운반이나 처분도 어렵기 때문에 눈독을 들이지 못하는 반면 크기가 작은 것은 처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쉬 그들의 대상이 된다.렘브란트의 그림 중 가장 큰 사이즈를 자랑하는 「야경」같은 작품은 도난당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크기가 작은 「야코브 데 헤인 3세」는 16년 동안 무려 4회나 도난 당해 ‘들고 가는 렘브란트’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그래서 그림의 크기는 그림의 도난에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크기 때문에 훔칠 수가 없는 것은 미술범죄의 하나인 예술 파괴 행위의 대상이 된다. 1975년 9월에 28세 된 전직 어학 교사라는 청년이 칼로 「야경」을 13번이나 찌르고 째는 난동을 부리며 하는 말이“나는 하늘에서 보내졌다. 그래서 지구 이외의 힘이 나로 하여금 이 행위를 하게하고 있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신이상자였다.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에는 베르메르의 그림도 소장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1658~59), 「골목길」(1658~59),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1662~65), ‘연애편지’(1669~71) 등의 4점이다. 이 그림들의 크기는 대부분 60cm평방이나 ‘연애편지’의 크기는 44 x 38 cm로 커다란 거장들의 그림에 비하면 아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나 어떤 행사가 있을 때는 이 미술관의 그림을 대여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베르메르의 작품이 선택되었다. 1971년 9월에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Palais des Beaux - Arts)에서 「렘브란트와 그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 측에서 베르메르의 작품 「연애편지」를 대여했다. 전시는 9월 23일에 개막되었다. 그러던 중 유독 베르메르의 「연애편지」만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24일 벌어졌다. 그림을 훔치는 수법은 매우 서툴렀지만 범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시회장의 경비가 허술했기 때문이며 결국 작품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범인은 낮에 전시장으로 숨어 들어온 후, 한밤중에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 캔버스 부분을 칼로 잘라냈다. 그리고는 잘라낸 그림을 둥글게 말아 주머니에 넣고 커튼을 줄로 이용해서 지상으로 내려가 도주했는데 미술관 안에는 경비원이 있었으면서도 범행이 일어난 것을 다음날 아침까지 몰랐다. 이런 사건이 있은 10일 후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브뤼셀의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틸’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범인은 자기가 그림을 훔쳤다고 하며 동파키스탄 난민에게 2억 벨기에 프랑 2억(약 400만 달러)을 지원하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전시회장에서 국제적인 반 기아 캠페인을 벌일 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베르메르의 「연애편지」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범인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던 ‘틸’은 플랑드르 지방의 전설적인 인물로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의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Till Eulenspeigels Merry Pranks)’의 제목에 등장하는 의적(義賊)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범인은 의적을 자처해 그림을 훔쳤고, 그림에 대한 교환 조건으로 난민에 대한 원조를 촉구하는 정치적인 목적에 활용했던 것이다. 범인은 다시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파키스탄 난민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부가 원조하도록 해 준다면 그림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흥미를 느낀 한 기자가 취재 요청을 통해 베르메르의 그림을 정말로 갖고 있다는 확증이 없는 한 그런 기사는 쓸 수 없다고 응수하자 범인은 순순히 기자에게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전했다. 기자는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쯤 떨러진 지점의 한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 장소에 이르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범인이 나타났다. 범인은 기자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는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서야 눈가리개를 풀어 그림을 확인시키고 사진을 찍게 하였다. 사실을 확인한 기자는 약속대로 그림의 절취 목적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그럼에도 난민의 원조나 이를 약속하는 행위를 취하지 않자 범인은 각종 언론 기관을 통해 같은 수법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범인은 어이없이 체포되었다. 즉 주유소의 공중 전화를 이용해 대중 매체에 전화를 돌리던 그는 오토바이에 붙여 놓은 ‘틸’이라는 네임 스티커 때문에 주유소 사장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체포된 범인은 21세의 호텔 웨이터였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동서 파키스탄의 전쟁이 원인이 되어 인도로 흩어진 7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난민의 비참한 상황을 알고는, 당시 신문에서 세계적으로 30점 정도밖에 없다고 보도된 베르메르 작품의 희소가치를 이용해 동파키스탄 난민의 지원금을 요구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도둑맞은 「연애편지」는 범인의 방 침대 밑에서 베개 커버에 휘감긴 채 발견되었다. 그림의 물감이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갔고 특히 가장자리 부분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국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하여 복원 방법을 논의했다. 한편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범죄로 인해 명화가 손상되었을 경우 복원해서 은폐하기보다는 그대로 보존해 범행의 실태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위원회는 「연애편지」의 파손 부분을 완전히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복원 작업이 완성된 것은 다음 해인 1972년 8월, 도난 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범인은 절도와 공공물 파손의 죄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으며 6개월을 복역한 후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5년간의 보호 관찰의 조건이 붙었다. 이 사건이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미술 작품의 절취 목적이 정치적이었다는 것과 도난당했던 그림의 파손이 너무나 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문국진 박사,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법의학자]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사람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