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69)는 1632년부터 이듬해까지 1년 사이에 초상화만 약 46점을 그려냈다. 그는 초상화 한 점에 500굴덴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한 상인이 1년을 장사해서 벌 수 있는 액수였다고 하니 그는 화가로서 거부가 된 셈이다. 렘브란트는 그의 후원자이며 화상이었던 헨드리크 반 웰렌부르흐의 집에 살면서 이 집의 조카딸인 사스키아라는 처녀에게 완전히 반해 버려 청혼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그녀는 고아였는데,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처녀로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녀에게는 4만 굴덴의 지참금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을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의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미소 짓는 사스키아의 초상’(1633)이다. 그런데 그림에서 그녀는 그렇게 대단한 기쁨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즉 입가에 미소는 지우고 있으나 입주위의 근육이 작동한 것이 아니라 볼에 있는 근육이 강직(强直)을 일으켜 입술이 덩달아 간 미소이다. 그래서 볼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다. 즉 사스키아는 처음으로 모델을 선 것이기에 긴장되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소는 이렇듯 사람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감정의 문을 닫는데도 이용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눈은 꽃을 꽂은 헐렁한 모자 아래의 그늘에서 귀엽게 반짝이고 있다. 생전 처음으로 약혼이라는 것을 해 기쁘기는 하나 모델이라는 것을 서라는 약혼자의 요청에 의해 서기는 하였으나 불안하고 긴장되는 것을 화가는 숨김없이 그대로 표현하였다. 약혼한 다음해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자 렘브란트는 고급 주택을 사들이고 화려한 의상이나 사치스러운 골동품 등을 마구 사드려 주위 사람들의 좋지 않은 눈초리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작품이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방탕한 아들’(1635)이다.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 무릎에 앉힌 채 오른손에 긴 와인 잔으로 축배를 들고 있으며 화려한 옷에 검까지 차고 있다. 사스키아는 불안한 듯한 표정이나 화가는 미소를 짓고 있는데 진실로 즐거워서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허풍을 떨기 위한 시위용 미소이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누가복음’ 15장 11-13절에 기록된‘ 방탕한 아들’로 비유하고 있다. 즉 그는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 몫을 먼저 떼어 받은 후, 외국에 나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모두 탕진해 버린 ‘방탕한 아들’로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남이야 무슨 짓을 하건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그 부당성을 그림으로 항의하면서 허풍 미소를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도발적 표현은 결코 화가의 본성은 아니었으며 그 후에 그려진 에칭 ‘렘브란트와 사스키아’(1636)에서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스키아에 대한 화가의 사랑은 애틋한 것으로 그녀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어 즐거운 표정을 한 사스키아를 그린 것이 ‘꽃을 든 사스키아’(1641)이다. 시선은 한 곳을 주목하면서 입가에는 미소를 지을 듯 말듯하고 양쪽 구각부가 약간 함몰되면서 위로 살짝 올라가있는 것은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보는 미소표정의 만능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사스키아와 화가의 행복한 생활은 영원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두 번이나 사망하였으며 셋째 아들인 티투스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티투스가 채 한 살도 되기 전인 1642년에 사스키아는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사스키아와의 정을 잊지 못하는 화가는 죽은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는데 그중에서 ‘화가의 아내 사스키아’(1643)를 보면 우선 사스키아는 병고로 인해 많이 수척한 얼굴이다. 눈길의 초점은 맞질 않으며 아래 위 입술은 가볍게 다물고 무표정한 상태에서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으로 미소와는 거리가 멀다 즉 죽은 사람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미소의 표정은 전연 없는 그야말로 무표정한 얼굴이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통해 긴장 속에 자아내는 억지 미소, 자기의 허풍미소, 결혼생활에서 참으로 즐거움을 느껴 지우는 행복한 미소 그리고 죽은 이의 무표정의 얼굴 등을 남겼다. 프랑스의 화가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부인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nux 1847-79)의 미소에 관한 이야기와 그 표정도 빼놓을 수 없다. 모네는 화가가 된 후 1874년에는 세잔느, 드가, 르누아르 등의 동료화가들과 함께 개최한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을 인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네가 자신의 영원한 모델이자 아내인 카미유와 만난 것은 1865년 카미유가 18세이고 모네가 25세로 두 사람은 모델과 화가의 관계로 만났지만 곧 사랑에 빠져 동거하게 되었으며 1867년에는 아들 장을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네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 하였는데 그것은 카미유가 직업적인 모델 출신이며 모네의 아내가 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네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모델로 한결같이 화사한 빛과 그림자의 그림을 추구하며 담담하게 운명의 드라마를 펼쳐갔다. 화가가 자화상 이외 가장 쉽게 모델로 끌어들일 수 있는 타인은 가족이고, 가족 중에서도 아내가 우선이다. 아내는 모델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화가는 모델이 된 아내에게 표정이나 포즈를 자연스럽게 요구할 수 있다. 아내 역시 화가와 함께 생활하는 만큼 남편의 작품은 물론 그릴 때의 심리와 기분을 다른 모델보다 잘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이 걸작이 많다. 모네가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그림 중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눈물을 삼키며 보게 하는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일본 여인(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이다. 당시 파리에는 일본풍이 유행되고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도 자포니즘(japonisme)의 영향이 널리 퍼졌던 때인지라 모네도 아내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히고 춤을 추는 듯한 몸짓을 하는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생활고에 허덕이다 보니 예술성을 강조하기보다 팔려서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미유에게 화려한 일본 옷을 입히고 병들어 누렇게 뜬 얼굴이지만 억지웃음을 지우게 하였으며 카미유는 이를 저항 없이 따랐던 그들의 처절했던 상황과 관계가 스며있는 것이다. 카미유는 붉은 색의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초록색 벽을 장식한 부채가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주어 고달픈 생활고나 가정적인 문제 등의 어려움은 철저하게 감추어진 그림이다. 사실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 카미유의 몸에는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그림 속의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다른 그림에 비해 누렇게 뜬듯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미소 진 얼굴을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기억의 실타래를 잡아당기며 더듬어보면 분명 이 미소는 상품광고에서 흔히 보는 모델들의 미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고 보면 그녀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히고 부채를 들게 하고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 모델이라는 느낌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가선다. 화가의 아내라고 하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즉 그녀로서는 그려야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호구지책을 위해,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웃으라 하니 나오지 않은 웃음을 억지로 웃다 보니 누가 보아도 어색한 미소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문국진 교수]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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