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ing] 무아 도취 (無我陶醉)의 병
엠디저널 | 입력 : 2014/01/01 [09:50]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무엇에 열중하여 무아경(無我境)에 빠지는 것은 그만큼 일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해서 좋은 것인데, 문제는 자기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도취되는 것이 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무아 도취의 병"으로 부르기로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를
의기 투합(意氣投合)의 무아 사람은 두 가지 본능을 지녔다. 그 하나는 자기 보존 본능이며 다른 하나는 종족 보존 본능이다. 자기 보존은 식욕이라는 본능으로, 그리고 종족보존은 성욕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에 있어서 식욕과 성욕은 매우 중요한 본능이며 인간에게 이런 본능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성욕의 나무에는 사랑의 꽃이 피고 꽃은 자손이라는 열매를 맺게 한다. 성욕은 신이 인간에게 준 신기하고도 놀라운 힘이다. 성욕을 만족시키는 성적 접촉은 육체적 쾌락의 최고봉이다. 그러나 이것에 지나치게 도취되다 보면 부정(不貞), 물의(不義)의 간음이 생겨나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사랑의 표현의 한 방법으로 키스(kiss)라는 것이 있다. 키스는 고대 희랍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의 높은 자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으며 성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던 것이, 고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부터 성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상대의 손잔등, 볼이나 이마에 가볍게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입술과 입술로 변하고 그것이 혀가 상대의 입속에 들어가는 소위 튜브 키스(tube kiss)로 변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키스에는 일정한 단계와 순서가 있어 우선은 서로의 의사가 통해서 사랑함을 확인하는 소위 의기 투합의 단계가 필요하다. 이런 것을 잘 표현한 그림이 있다. 에로티시즘의 화가 클림트(Gustave Klimt 1862-1918)가 그린 "키스(1907-08)"에 등장하는 남자는 여자를 포옹하고 볼에다 입을 대고 사랑을 전하고 있으며, 여자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머리를 뒤로 제쳐 자신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모두 내맡기고 있어 사상의 신비를 은은히 발산한다. 즉 두 남녀는 의기 투합된 상태에서의 사랑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영국의 화가 로세티(Dunte Gavriel Rosetti 1828-1882)가 그린 "키스 당한 입술(1859)"은 의기 투합의 단계 없이 일방적으로 키스를 당한 여인의 황당한 모습을 그려, 클림트의 "키스"처럼 절정에 도달한 여인의 황홀경을 보석처럼 빛나는 색채로 묘사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키스 장면을 묘사한 화가로는 제라드, 부셰, 프라고나르, 카노바, 번존스, 제리코, 브랑쿠지, 피카소 등 여러 화가의 그림이 있으나 일방적으로 키스를 당한 것을 표현한 그림은 아마도 로세티의 그림뿐인 것 같다. 간담상조(肝膽相照)의 무아 사람들은 사랑하거나 가깝고 친하다는 표현으로 악수하거나, 포옹, 키스 등을 하게된다. 이러한 몸의 일부가 서로 접촉함으로써 친교(親交)를 표현하는 것인데 악수를 하면 손바닥의 땀(汗液)이 서로 교환되고, 키스를 하면 침(唾液)이 서로 교환된다. 그래서 결국은 체액의 교환이 친숙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는 셈이다. 한번의 키스로 교환되는 침의 양이 무려 9ml나 되고 보면 진한 접촉일수록 그 양은 더 증가될 것이며 땀보다는 침이, 침보다는 정액과 질액의 교류가 더 친교가 깊어짐을 나타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체액 교환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은 사랑의 심도에 따라 의기 투합에서 서로가 이해되어 서로의 마음을 그것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를 서로 볼 수 있을 때, 즉 간담상조라 해서 간(肝)이나 담낭(膽囊)까지를 서로 보고 보이는 사이로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 가능한 일이다.
프랑스의 화가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가 그린 "헤라클레스와 옴팔레(1730)"를 보면 사랑의 전희로서 깊은 입맞춤을 하는, 즉 키스를 가장 격렬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키스를 할 때 결코 서둘지 않으며 서로간의 입술을 통해 자기들만의 소우주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키스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음미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만일 입맞춤으로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미건조한 사랑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화가들은 "키스"라는 나름대로 무궁무진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여 그림을 그렸다.
부셰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이 로코코 시대인데 이 시대가 바로 연애의 시대였으며 남녀노소가 성을 쾌락의 무기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던 화가도 사랑의 절정 장면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부셰가 바로 이런 로코코 회화를 대표하는 프랑스 궁정 화가였다. 그러나 연애의 가치가 드높던 그 시대에서도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라는 신화의 이름을 빌려서 제목을 달아야 비로소 진한 육체의 탐닉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그림의 신화를 주제로 한 것을 시사하기 위해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사랑의 요정 큐피드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할 일이 없어 장난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어 단지 이들의 등장으로 신화임을 시사하는 역할만을 하고있다.
두 눈을 감고 사랑의 전희를 즐기는 남녀는 관능적인 색감을 통해 더 도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청동상을 방불케 하는 헤라클레스는 구릿빛으로 칠해졌고 그의 힘과 격렬함은 단지 여성의 가슴을 움켜쥔 손이 힘찬 표현에 의해 인지될 뿐이다.
몸매가 아름답게 묘사된 옴팔레는 횐 피부를 드러내어 탐스러운 몸매를 감상하게 하고 있으며 사랑이 주는 경이로움에 여인은 다리를 들어 남자를 애무하고 있다. 쾌락의 달콤함을 궁중과 귀족 사회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부셰는 그림의 모든 소재를 이처럼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노골적인 성화가 아직 쑥스러웠던 조기 로코코 시대에, 또 문란했던 구정의 성풍속에 르네상스 풍의 세련된 정신세계를 슬쩍 끼워 넣어, 밤의 열기와 남성 편력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여 그 시대 궁정 생활에서도 이 육감적인 그림은 감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 세 그림을 통해 사랑은 우선 의기가 투합 되고, 간담을 서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성숙된 뒤에 맺어지는 것이 건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한번보고 자아를 쉬 잃고 날뛰는 무아도취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한 경고가 되기도 한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문국진 교수]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