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철학이 생활을 지배하던 시대는 선비다운 지조(志操)나, 학자다운 생각과 행동이 존경과 경모(敬慕)의 대상이 되었었고, 이것을 사람다운 삶의 기본적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기준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역사책의 어느 한 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러 번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나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이상한 관습’ 정도로 치부되어 남게 되었다.
그 대신 인간다운 삶의 정의에 대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던 과거와는 달리 다원적 구조에 따르는 다양한 논리가 생활을 지배하는 복잡한 현대 사회의 일상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오늘 이거 완전히 이상한 사람만나서 고생하게 되었네”하는 생각이 불현 듯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부위부강(夫爲婦綱)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일종의 경구들이 과거에 부분적으로 잘못 해석이 되었거나, 지나치게 고식적이고 강압적 의미를 강조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사실 그 내용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적 구성원의 역할 분담이나, 인격체로서의 상호존중의 의미를 강하게 포함한 ‘다움’의 철학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남편은 남편다움이 있어야하고, 부인은 부인다움이 있어야하며,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다워야 하는 것이고, 부자 관계에는 비록 큰 죄를 저지른 아들이라 하여도 감싸 주어야하는 애비자식다운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다움’이라는 생활 철학 속에서 살아왔다.
오늘날도 ‘인간다워야 한다’는 ‘다움’을 의미하는 하나의 구절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인간다운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정의를 달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기대하는 ‘다움’의 의미와 정도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쉴 사이 없이 변하여 왔다. 사실 이러한 변화가 없었다면 지구상의 인류는 미래 지향적 발전을 추구하지 못한 채 그날그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였어도 보편적 사회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의 실천적 도의(道義)이고 보면, ‘다움’의 철학은 좋든 싫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인 ‘답지 못한 식자(識者)’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혼란과 갈등으로 점철 될 수밖에 없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현시적인 자들만 득실거릴 것이다. 교육자답지 못한 교육자들이 교육의 현장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기대할 것이 없다. 국민답지 못한 국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정치인답지 못한 정치 모리배들만 있다면 그 나라의 앞날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회의 특정한 분야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답지’ 못한 행동으로 자기만의 삶을 주장한다면, 애매한 희생은 선량한 국민들의 몫이 되고 만다.
이렇게 다움의 철학은 곧 체면의 철학이고, 이것은 곧 이 사회를 위한 역할 분담과 사회적 기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의료계는 오랜 내부적 갈등의 지루한 논쟁과 다툼으로 이제는 사회적 질시 내지는 척결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관계없는 그들만의 내부적 갈등으로 세상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귀찮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갈등의 원인이 의료계 외부의 세상 사람들의 체계화된 힘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이전투구의 내부적 갈등으로 방휼지쟁(蚌鷸之爭)의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의사답지 못한 일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여기저기서 도출되고 있음으로 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의료계에 대하여 냉소적인 입장이 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의료계의 원로들은 격앙된 분노를 토로한다. 하지만 의사로 살아가는 여건이 예전과 다른 오늘의 젊은 의사들은 본인들의 입장에서 한 발작도 물러서려하지 않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 서로간의 시시비비는 따져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료계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이고, 이것이 의료계가 앞으로 어떠한 형태로 이 사회 속에 존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며, 그 평가의 주체는 바로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료계의 어려움은 시민들의 이해 속에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그렇기 위해서 의사들은 의사다움의 철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다원화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의사들도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수많은 동료들도 있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질적인 국민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의사는 의사다움의 철학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의사다움의 철학 속에 존재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야 한다.
한편, 이제는 의사들이 의사답게 살 수 있고, 의사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재원은 사회적 비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의사들이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의사가 된 이후의 온갖 법률적 규제 속에 강요된 사회적 역할을 냉철하게 파악해 본다면 필자의 이러한 주장이 허무맹랑한 집단 이기주의적 사고를 대변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평가 절하 되어서는 안 된다.
의사들은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닐뿐더러,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이 사회를 위하여 아주 작으면서도, 중요한 공공성의 책무를 상당 부분 담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만들어 가는 것은 사회적 공공성이 부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다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으로서의 ‘다움’이 있을 수 있고, 공공성이나 사회적 집단의 힘이 갖는 덕목으로써의 ‘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다움’이 지켜 질 때 우리 사회는 나눔과 기여의 화평함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움’이나 ‘이웃다움’ 또는 ‘우리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어려움이 산처럼 쌓여가는 동료들에게 그래도 의사다움은 끝까지 지켜가자는 제언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