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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진리를 찾는 어느 지성인의 오디세이

김재천 기자 | 기사입력 2014/04/01 [09:20]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진리를 찾는 어느 지성인의 오디세이

김재천 기자 | 입력 : 2014/04/01 [09:20]

1. 도서명 :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진리를 찾는 어느 지성인의 오디세이


(원제: From Pagan to Christian)


2. 저자/역자 : 린위탕(임어당) 지음 | 홍종락 옮김


3. 정가 : 15,000원


4. 출간일 : 2014년 3월 31일


5. ISBN : 978-89-97760-75-6 03230


6. 쪽수 : 372쪽


7. 판형 / 제본 형태 : 140*210 / 양장


8. 분류 :


기독교>신앙생활>인물/전기


기독교>문학/문화>에세이

 

 

 

 


9. 책소개


《생활의 발견》의 저자 린위탕(임어당)의 원숙함이 빛나는 후기 대표작!


동서양 사상의 통찰력 넘치는 세계를 돌아본 쾌활한 지성인의 흥미진진한 지성과 영성의 오디세이!


★ “내 30대의 성서!” _이윤기(소설가)


“나는 이교도다.” 《생활의 발견》에서 단호히 선언했던 린위탕이 22년이 지나 자신의 영적 편력과 귀향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동서양 사상과 종교를 두루 천착한 빛나는 지성인의 꾸밈없는 회심기이자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의 핵심을 소개하는 비교 종교학 입문서, 통찰력 넘치는 현대 문명 비평서로도 탁월하다. 독특한 관점, 핵심을 꿰뚫는 놀라운 통찰, 재미있는 에피소드, 자유롭고 호방한 정신과 촌철살인의 문장이 빚어내는 매력적인 이야기!

 

 
10. 추천사


“내 30대의 성서.” _이윤기(소설가)


“《생활의 발견》보다 더 매력적이다. 음미하며 소화하면서 읽을 책.” _〈커쿠스 리뷰〉



11. 책 속에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사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가까이 있는 높은 산은 하나님의 크심을 가까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흐린 자줏빛 산비탈과 산꼭대기 위로 제멋대로 하염없이 흘러가는 멋들어진 흰 구름에 매료된 채 경이감에 사로잡혀 서 있곤 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나면 낮은 언덕이나 인간이 만든 작고 인공적인 것들은 하찮게 보인다. 그 높은 산들은 나와 내 종교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것들이 내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풍부함과 내면의 힘과 독립심을 주었다. 그 산들 덕분에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라는 성경구절에 공감하게 되고 높은 산의 젖은 풀밭을 맨발로 거니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없다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_19쪽
 

둘째누나는 똑똑하면서도 변덕스럽고 짓궂은 나를 사랑했다(프로이트주의자들은 물러가라!). 다른 형제들이 의무감에 공부하는 시늉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마당으로 달려 나가 놀았다. 내가 더 컸을 때 누나는 내가 어릴 때 정말 못되게 굴었다면서 한번은 누나와 말다툼을 하고는 분을 못 이긴 채 복수한답시고 뒷마당 흙탕물 구덩이에 드러누워 돼지처럼 몸을 구르고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자, 이제 누나가 이 옷 빨아!” 그 순간 내 모습은 정말 더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_25-26쪽


사실 사람이 어느 대학에 가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도서관이다. 하나님나라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자질도 사람 안에 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정신은 원숭이와 같아서, 숲속에 풀어놓기만 하면 된다. 어디 가면 견과가 있는지 알려줄 필요도 없다. 좋은 견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 필요도 없다. _31쪽


그런데 중국인에게는 추상적 개념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여자들이 수다를 떨 때처럼, 중국어에서는 모든 것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슬금슬금 움직이거나 둘이 하나로 합쳐지거나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중국의 추상 개념들은 중국인의 구체적인 사고 법칙에 따라 두 개의 구체적인 특성이 합쳐져서 생긴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대소大小는‘크기’를 뜻하고“(다이아몬드의 대소가 어떻게 되는가?”), 장단長短은 길이를, 경중輕重은 무게를 뜻한다. 더욱 설명하기 힘든 것은‘물건’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단어가 동서東西라는 것이다“(냉장고에 뭐라도 먹을 동서가 좀 있나요?”). 엄밀한 철학적 개념들은 정正, right, 의義, justice, 충忠, loyalty, 이利, interest와 같이 비슷하고 아리송한 단음절어로 되어 있다. 시비是非의 경우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이라는 두 쌍의 개념을 합쳐놓아서 두 영역의 경계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_78-79쪽

 

공자는 이렇게 자기수양이 된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을 문자적으로 ‘작은 사람’을 뜻하는 소인이라 불렀다. ‘소인’의 정확한 번역어는 ‘보통 사람’도 아니고 ‘비열한 사람’도 아니다. 소인의 본질은 ‘천박한 사람’, 자기수양이 안 된 사람, 교양 없는 사람이다. _106쪽


유교가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공자가 인간 본성에 불가능한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 없음, 엉터리 가정교육, 수양이 안 된 사람들의 무지한 자기만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사람이 모종의 도덕의식을 갖고 자기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런 의미에서 유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이 실천하기 쉽다고 주장하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번은 공자가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성인을 찾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군자를 만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공자의 가장 비범한 면모는 그가 순전히 인간적인 기준을 제시했고 인간의 척도는 인간 자신이라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_106쪽

 

 중국의 유산과 유럽의 유산(그리스 철학, 스콜라주의 신학,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등)은 달랐고 다른 식으로 발전했다. ‘뇌에 칼을 품고’ 태어난 서양인들은 너무나 날카로운 논리의 무기를 휘둘러 접촉하는 거의 모든 것을 잘라내고 온전한 진리를 훼손했다. 초자연적인 종교는 기반을 잃었지만 스콜라철학적인 정신의 습관은 남았다. 인간은 스스로를 해부하여 인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치한 사이비 과학적인 유물론의 괴물들을 만들어냈고 그 후 정작 자신은 밀려나버렸다. _143쪽

 

 노자는 공자보다 깊이가 있다. 중국이 공자만 배출하고 그와 상반된 사상가 노자를 낳지 못했다면 나는 중국 사상을 부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테네에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도 있었던 것이 반가운 이유와 같다.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더 위험하고 사변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확실하고 논리적이지만, 한 나라에는 둘 다 필요하고 둘 다 쓸모가 있다. 동생 마리아는 요리가 서툰데다 옷차림도 단정하지 않았겠지만, 집 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모두 있어야 한다. _153쪽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경이감을 느낄 권리가 있다. 궁금하게 여겨도 아무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 너머에 놓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이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해방의 경험이다. 강아지도 주인이 하는 일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는데, 인간이 푸른 하늘 저 너머를 보고 경이를 느끼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보다는 궁금증을 품었다가 아무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쪽이 낫다. _155쪽

 

 도교와 유교는 중국인의 영혼에 교대로 나타나는 두 정서이다. 모든 중국인은 성공할 때는 착실한 유가에 속하다가, 곤란을 겪거나 어려움과 실패로 괴로워할 때는 도가에 속한다. _155쪽

 

 


장자의 문체는 위대한 지성과 장난기 어린 재치, 넘치는 상상력에다 작가의 표현력까지 갖추었다. 다시 말해, 장자는 최고 수준의 작가였고 중국에서 그와 비길 만한 천재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400년 후의 일이었다. 그 천재는 바로 소동파다. 장자와 맞먹는 지성과 우아하고 재치 있는 표현력을 가진 소동파는 불교와 도교, 유교를 모두 아울렀고, 산문은 공식적인 글과 편안한 글을 모두 잘 썼으며, 운문도 온갖 형태의 시를 빼어나게 잘 썼다. 매력적인 헛소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매력적으로 쓰는 일은 전혀 다른 재능이며 신의 음료만큼이나 희귀하다. _185-186쪽

 

 


물질적인 지식의 영역이나 사실에 대한 과학지식의 영역에서는 시간, 공간, 운동, 인과관계라는 범주에 의한 추론이 탁월한 성과를 냈고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의미와 도덕적 가치의 영역, 즉 종교와 사랑과 인간관계에서는 흥미롭게도 이 방법이 적합하지 않으며 정확히 말하면 아예 부적절하다. _258쪽

 

 예수의 세계에는 힘뿐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도 있다. 공자의 자기제한, 붓다의 지적 분석, 장자의 신비주의와는 다른, 절대적으로 밝은 빛이다. 다른 이들이 추론한 부분에서 예수는 가르쳤고, 다른 이들이 가르친 부분에서 예수는 명령했다. 그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과 사랑이 전해졌다. 더 나아가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그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어떤 단서도 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위대한 진리가 무릇 단순한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인간 발전 원리의 싹이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단순한 진리 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_334-335쪽


우리는 왜 학교에서 셰익스피어를 감상하도록 배우지 못한 걸까  학창시절에 셰익스피어를 무조건 무서워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멀리해왔다. 신학 교리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내게 싸구려 액자 속 렘브란트 초상화와 비슷해 보였다. 싸구려 액자는 렘브란트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가치를 가려버린다. _343쪽

 

 


나는 그 멋진 노부인께 가까이 갈 때마다 기독교 정신의 참된 화신 앞에 서는 것 같았다. 그 곁에 서면 늘 잃어버린 세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을 낳는 것은 기독교인이지 기독교신학이 아니다. _348쪽

 


12. 저자 소개


린위탕(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작가, 비평가. 1895년 중국 푸젠성 장저우에서 태어나 동서양의 영적․지리적 영역을 넘나들며 살았다. 1916년 상하이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미국 하버드 대학과 독일 예나 대학에서 공부했고 1923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북경대 교수와 싱가포르 난양 대학의 총장직을 맡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는 상아탑에 갇힌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상의 세계뿐 아니라 행동의 세계도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7년 우한 정부 외교부장의 비서로 일했고 1948년에는 유네스코 문학예술부장을 맡았다.


린위탕은 무엇보다 문학과 철학계에 기여한 업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논어論語〉, 〈인간세人間世〉, 〈우주풍宇宙風〉 등 여러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으며, 중국어와 영어로 다수의 책을 썼는데 매력과 위트, 정이 넘치는 문체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쾌활한 천재Gay Genius》, 《내 나라 내 국민My Country, My People》, 《중국과 인도의 지혜The Wisdom of China and India》 같은 베스트셀러들에는 철학적 사색을 일상의 경험과 결합해내는 탁월한 솜씨가 잘 나타난다.


린위탕은 평생에 걸쳐 종교적․철학적 진리의 길을 추구했다. 대표작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에서 자신이 이교도인 이유를 설명한 바 있는 그는,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뒤 65세의 나이에 저술한 이 책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서 이후에 펼쳐진 영적 귀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 중국중앙방송에서 44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져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한 소설 《경화연운Moment in Peking》으로 1975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 홍종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에서 일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으며, 번역하며 배운 내용을 자기 글로 풀어낼 궁리를 하며 산다. 지은 책으로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공저)가 있고, 《그들이 나를 살렸네》, 《수상한 소문》, 《영광의 무게》, 《피고석의 하나님》, 《순례자의 귀향》 등을 번역했다. ‘2009 CTK(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번역가 대상’을 수상했다.

 


13. 출판사 리뷰


자유롭고 호방한 인생철학이 담긴 에세이 《생활의 발견》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린위탕(임어당)의 지적․영적 오디세이를 기록한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From Pagan to Christian》가 출간되었다. 중국 본토와 서구 세계를 오가며 작가이자 번역가, 비평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20세기 지성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린위탕이 원숙한 시기에 쓴 걸작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린위탕은 자신이 이교도(경멸적인 의미의 ‘heathen’이 아닌, ‘pagan’의 번역어로서, 내용상으로는 합리주의자, 휴머니스트에 가깝다)임을 선언하며 오늘날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신랄한 비평을 가한 바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의에 따라 신학 수업을 하기도 했던 그는 왜 기독교를 떠났고, 어떠한 여정을 거쳐 다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생활의 발견》의 선언 이후 22년이 지나 65세의 나이가 되어 쓴 이 책에서 그는 이 같은 입장의 변화 과정과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아울러 그가 모험의 길에서 만난 동서양 사상들의 핵심을 소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정수를 이야기한다. 그가 최초로 공개하는 회심기이자 영적 편력과 귀향의 기록이다.


린위탕의 영적 순례는 아버지가 목사로 있던 중국 남부 푸젠성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상하이의 대학 시절과 베이징에서의 교직 생활을 거치며 익힌 동양의 전통과 지혜에 매료되어 서서히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믿음의 모험을 떠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붓다 등 위대한 동양 사상가들의 통찰력 넘치는 세계를 누볐다. 린위탕은 이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그들이 어떤 면에서 인류의 정신에 기여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서로 유사하며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또 그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심장한지를 명쾌한 문체와 특유의 촌철살인의 문장에 실어 제시한다. 린위탕은 결국 기나긴 여정 끝에 그에게 가장 잘 맞는 형식의 기독교로 돌아왔다. 그의 기독교는 주어진 출발점이 아니라 추구 끝에 도달한 목적지였다.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스승 예수와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서양세계의 주요 사상가들까지 호의적인 태도로, 그러나 철저하게 검토한 끝에 최종적으로 기독교를 택했다.


나는 긴 여행 끝에 인간 영혼의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과정은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았고, 내가 오랫동안 믿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린 것도 아니다. 나는 달콤하고 고요한 생각의 초원을 걸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을 보았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나는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 _84-85쪽


■ “머리로는 고대와 현대의 학문을, 두 다리로는 동서양의 문화를 아우른다”


린위탕의 글에는 중국인 특유의 현실주의와 낙천성, 인생에 대한 긍정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문체에서도 여유가 넘쳐난다. 신랄하면서도 적절한 비유와 호방한 유머,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위트는 왜 그가 사후 4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루쉰과 더불어 현대 중국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평가받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 책이 갖는 또 다른 매력은 관점의 독특함이다. 이것은 린위탕의 범상치 않은 성장 배경과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인이었지만 목사 가정에서 자란 덕에 중국의 설화나 풍습보다는 성경 이야기나 기독교의 의식이 더 익숙했다. 뒤늦게 중국의 역사와 사상을 섭렵하며 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탈학습의 과정을 거쳤고, 미국에서 거주하며 영어로 글을 쓰면서 서양 세계에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소개하는 번역가이자 해설자의 역할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린위탕은 “머리로는 고대와 현대의 학문을 추구하고 두 다리로는 동서양의 문화를 아우른다”는 자신의 모토에 걸맞게, 중국의 직관적인 사고 내용을 서구의 논리적 사고로 해석하고, 서구식 사고방식이 담긴 명제들을 중국의 직관적인 판단력의 잣대로 시험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미국 혹은 유럽식 기독교나 학문적 방법론에 익숙한 한국의 독자들 역시 동서양의 전형적 시각을 넘어선 제3의 관점에서 동서양 종교와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영적 추구의 도상에 있는 이들을 위한 모험기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친절과 관심을 실제로 실천하는 기독교인을 볼 때마다 나는 기독교회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은 어떤 교리보다 효과가 있다. 예외는 오히려 규칙을 입증해준다. 내 어린 시절, 중국인 회심자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예수라면 당연히 그들을 사랑하셨을 테고, 선교사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대단히 실질적인 민족이다. 우리는 선교사들의 설교가 아니라 그들의 모습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한 뒤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 중 하나로 분류한다. 누구도 이런 최종적인 단순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_346-347쪽

 

 교회에서 가르치는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고 입으로 시인한다면 기독교인이 된 것인가  신학적 지식은 없지만 그저 예수를 따라 살려 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는가  신앙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인가, 탐색과 추구 끝에 얻는 것인가  린위탕은 미국식 복음주의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의 경우에는 신앙을 “어렵게 얻었다”. 그는 많은 교회들이 종교를 ‘일괄 포장’해서 팔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얻은 종교란 그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종교는 개인이 홀로 신과 대면하는 일이며 ‘개인과 신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를 찾아가는 이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의심과 주저함, 영적 충격과 의외의 만남, 난파의 위협이 가득한 여정이었다. “한쪽에는 저주의 지옥불이라는 스킬라가, 다른 쪽에는 조직화된 신앙에 따라오는 바리새주의, 서기관주의, 가야바주의라는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노리는 해협을 지나야 했다.” 그는 명민한 합리주의자이자 용감한 휴머니스트로서 이 위험한 추구를 계속했으며, 스콜라주의식 신학 논쟁의 부질없음을 공격하고, 지옥의 저주에 대한 설교로 신자를 모으는 오늘의 기독교를 통박하게 되었다. 이 여행의 끝에 그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이끄는 예수의 사랑 안에 정박한다. 신앙을 찾아 오디세우스와 같은 모험 중에 있는 독자라면 저자가 들려주는 이 모험기에서, 자신만의 철저한 탐구를 계속해나갈 통찰과 격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유불선 사상과 20세기 지성사를 여행하는 한 가지 방법


저자의 안내를 따라 동서양의 사상을 두루 유람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장자와 파스칼을, 인간 본성에 관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비교하는가 하면, 도가의 눈으로 불교를 해석하기도 한다. 20세기 중반 서양 세계에 동양 사상을 소개한 이의 내공이 느껴지는,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통찰력 있는 해설이다. 동서양의 사고방식을 비교하고, 현대 문명이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도 드러낸다. 그가 짚어보는 현대 세계의 좌표는 5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도 상당 부분 부합한다. 영국의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하여 호평을 받은 번역가 홍종락 선생이 《논어》, 《중용》, 《도덕경》, 《장자》, 《능엄경》 등 고전 인용이 숱하게 등장하는 까다로운 원문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우리말로 풀어냈다. 20세기는 물론 십수 세기를 넘나드는 인류 지성사의 수많은 인물들의 생몰연대를 확인하고 소개하는 수고를 더했고, 꼼꼼한 옮긴이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 유물론자보다는 우상숭배자가 더 진리에 가깝다


린위탕의 지적 오디세이는 자연과 영혼에 관한 지난 몇 세기의 사상적 조류를 가로지른다. 그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8세기를 인문주의가 장악하고 있었다면, 19세기와 20세기 초는 유물론이 풍미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는 ‘물질이 영혼에 밀려나는’ 종교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그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재검토한다. 린위탕이 새내기 신학도이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성경을 문학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들이 ‘영어를 잘 하는 무신론자’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는 무신론자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신론은 “제한된 사고방식과 제한된 시대의 합성물”이라고 주장하면서 “통상적인 믿음과 달리, 유물론은 우주의 문제를 논리적 귀결까지 밀어붙인 사상가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이 이상하고 낯설고 혼란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계선에서 딱 멈추어 선 사람의 관점이다”(291쪽)이라고 비판하며 유물론자보다는 차라리 우상숭배자가 대체로 더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 실용적인 중국인이 보기에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자들의 맹점은 그들이 탐구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넘어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목적인目的因에 대한 설명이 배제된 과학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러한 유물론적,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종교와 인생, 도덕을 논하는 것은 서구인에게라면 몰라도, 직관적으로 세계의 총체성을 인식하는 사고 구조를 지닌 중국인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상당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가 주도했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종교 비판과 무신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오래된 책에서 참신한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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