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여기에서 상술하는 북방이라 함은 중국 만주지방의 심양 서북방의 내몽고 자치주 일대와 통화 현(通化 縣)을 말한다. 우연한 기회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그 지방의 토광묘(土壙墓)에서 발굴한 기원전 1000-1500여 년 전의 적토기에 관한 유물을 접하게 되여 우리의 고대 토기와 한 맥이란 점을 발견하였기에 그 유사한 점을 비교,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중국이 우리의 상고사를 폄하하고 아예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없고 위만 조선만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도 자기들의 변방국이며 자기들의 역사에 속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성립한다. 근자에 와서 중국 고고학자들의 유적 발굴조사에 근거를 두고 7,200년 전에 심양을 중심으로 신락문화(新樂文化)가 존재하고 신석기시대에 심양에는 심양인(瀋陽人)이 번성하고 있었다는 설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중국 중원의 한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토한 셈이다. 그러니 주목할 것은 심양이다. 심양은 바로 압록강 건너가 아닌가. 엄연히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기원전 2333년) 기술되어 있다. 그러고 고조선은 발굴 유물을 통해 볼 때 세계 어디에도 없는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분포와 적토기의 발굴들이 요령지방과 내몽고와 만주와 조선 반도까지 내려오고 있지 않는가. 우리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시작이 아니라 만주 중원에서 건국 하였다고 하며 당시에 나오는 청동기는 중국 중원에서 나오는 청동기와 완연히 주조방식과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를 증빙하고 있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고인돌도 요동반도에서 만주와 우리나라 전라도에까지 고루 분포 되어 있고 적토기도 중국 것은 채도가 대부분이며 고대 만주와 우리 것은 거의 다 무문(無文) 토기로 되어있다. 그런고로 홍산 문화는 우리 선조 것이고 바로 우리 것 이다. 그동안 중국은 그들의 ‘사기’와 ‘한서’와 ‘삼국지’ 그리고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그들의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 내용들을 보면 적국(敵國)에 대하여 유독 폄하, 날조, 과장 하고 무조건 낮추어 기록한 것들이다. 일제시절에도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역사를 축소, 폄하, 왜곡, 날조 한 기록들을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여 공부하고 배워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이 날조되다시피 한 문헌을 통하여 접근하기 보다는 동쪽 오랑캐라고 폄하 하였던 홍산 문화권 속에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그 지방에서 나오는 발굴 유물을 보고 우리 민족의 과거 상고사를 증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주와 몽고 지방에서 소위 청동기를 사용한 민족이 어떤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든 그 사람들이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알타이계의 퉁구스족 이 든 예맥 족(濊貊 族)으로 알려지든 간에 또는 바이칼 호 주변 북국 권에 살았던 순록 유목민이든 간에 같은 몽고리언임이 틀림없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선조들임에 다를 바 없지 않은 가 생각한다. 이 좁은 땅에도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가 있었듯이 고조선의 광활한 땅에도 같은 문화권속에 살면서 중국의 한족과 상대하여 싸우며 밀고 밀리었던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에서 잠시 근자에 발굴한 북방지역의 적토기와 유물들을 보자. 그것들은 우리 원 삼국(原 三國)시대 토기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며 문양이 거의 같다. 이 적토기의 유물은 청동기 초기 시대의 유물로서 문양이 없는 무문(無文) 토기들이다. 그리고 초창기 적토기의 제작기법을 보면 형태의 좌우가 일정치 않아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본격적인 가마(窯)를 사용하지 않고 토기 위에 장작을 덮고 단순한 불더미 위에서 소위 노천소성(燒成)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마다 소송 중에 환원염에 저촉되어 불완전 연소에서 나오는 검은 흔적들이 토기표면에 배여 있다. 이 토기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고운 황토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적토기 이다. 간혹 검은색을 띤 흑토기도 보인다. 또한 원시적인 물레의 흔적과 성형(成形)제작기법의 발전으로 대형 토기도 보이며 타날 법(打捺 法)과 같은 방법으로 만든 것도 보인다. 대다수의 적토기 들은 부장목적이거나 에기(禮器)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러한 토기들이 그 형태에 있어서 우리 원 삼국시대의 토기와 너무나 유사한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야시대를 거처 일본 규슈 사가 현 (요사이노가리 유적)까지 이어지는 한줄기의 맥을 본다. 북방 적토기중에서 그릇 받침대(土器器臺)가 있다. 바닥인 둥근 항아리의 원저 호(圓底壺)를 올려놓기 위한 용도로 제작 되어 대부분 의식용으로 아니면 재기용으로 사용되어 부장 한 것 인데 우리 백제의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그릇 밭침 대(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와 똑같다. 단 북쪽 것은 적토기이며 백제 것은 회색으로 색이 다를 뿐이다. 이 두 그릇 받침대 제작 년대는 1000-1500여년의 간격이 있다. 허나 이 두 토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떻게 설명을 하여야 할지 너무나도 똑같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릇받침대는 시대를 내려 갈수록 발전되어 그 모양과 소성방법이 다르다. 이 그릇받침대는 가야 시대 신라시대에 와서도 흔하게 나타났다. 기대 발(鉢) 부분과 통형이 길어지고 대좌(臺座) 로 구성되어 하반부가 넓어 안정감을 보여준다. 발 부분은 백제 것과 신라 것이 다 나팔모양으로 벌어져 있다. 긴 몸통에는 백제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4단계가 아니라 5단으로 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투창이 뚫어 있고 백제 것은 삼각형인데 신라 것은 긴 직사각형이다. 이 기대(器臺)는 가야 것이 가장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경북고령 가야고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방적토기 에도 유사한 가야토기 그릇받침대의 같은 모양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적토기 중에 소뿔 형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牛角形把手附臺附壺)가 있다. 나팔처럼 벌어진 구연과 몸통에 손잡이가 소뿔 형으로 되어 있고 좌우로 두개가 있는 것도 있고 3개가 달린 것과 전후좌우 4개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손잡이는 ‘ㅅ’ 자형으로 구부려 몸통에 부착하고 끝이 뾰쪽하다. 태토는 고운 황토를 사용하여 만들어 졌고 항아리 하단부위에는 받침이 있는 것도 있고 받침이 분리된 것도 있다. 없는 것은 바닥이 약간 둥근 편인데 우리나라에서 발견한 항아리는 밑받침이 있고 좁아 불완전하게 보인다. 양자 다 예기(禮器)용이나 부장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사료된다. 이 또한 우리나라 경상도를 중심으로 많이 발견되었지만 일본사가현 요사이노가리 유적에서도 소뿔형 손잡이 두개가 달린 항아리가 발굴되었다. 일본사가현에서 발견된 것은 북방에서 발굴된 소뿔달린 항아리와 같다. 우리 것은 와질토기(瓦質土器)이며 물의 흡수가 강하여 일반적으로 생활에서의 사용이 불편하고 역시 제기용이나 부장품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둥근 몸통에는 제작할 때 도구로 표면을 두드려 새겨 넣은 승석문(繩蓆文)이 많이 보인다. 허나 그런 것이 없는 경우의 것도 중앙박물관 신석기 및 청동기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번에 본 북방토기 중에 대형으로 만든 오리토기가 있다. 날개를 생략하고 몸통의 허리중앙에 원통형의 굴뚝처럼 통을 만들고 물을 붓게 만들어져 있다. 주둥이는 오리모양으로 되어 있고 벼슬은 머리 위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꼬리는 잘라 구멍을 냈다. 다리는 받침대로 안전하게 만들고 몸통은 물이 많이 들어가게 푸짐한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오리나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신앙에서 죽은 자에 대한 장례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고 고대인의 내세에 대한 믿음을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소형 오리나 새를 박물관에서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큰 오리 적토기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역작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에도 토기성형에 있어서 점토 대를 쌓아 올리는 윤적법(輪積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이렇게 큰 토기는 처음 본다. 이 토기의 등과 꼬리에 구멍이 있고 안은 텅 비어있다. 아마 물을 담아 장례 시에 예기(禮器)로 사용 후 같이 부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3세기 후반에 낙동강 연안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야고분에서 나오는 와질토기(瓦質土器)들의 수많은 제기 형태가 고대만주의 대평원에서 출토되는 적토기와 엇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너무도 유사한 것에 고대 한민족의 발자취를 추리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다. 고조선과 부여, 원 삼국 (原 三國)과 가야, 그리고 고대 일본까지 동일한 민족의 문화권이 내려 왔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고대만주지방에서 나온 대형 적토기 중에 장례 시에 묘 속에 넣는 진 묘수(鎭墓獸)도 보인다. 토우 또한 고운 황토로 만들어진 익살스러움이 우리 토우와 유사하다. 중국 당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와 같은 중요한 청동기시대 적토기의 유물을 중국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고도 왜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우리 원삼국시대의 고고학적인 유물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련만 하나 같이 출토되는 적토기와 유물들이 우리 조상의 것과 맥이 이어져 있으며 삼국시대의 것과 유사하고 그 문물들이 한반도를 거처 일본으로 흘러간 사실에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의 중원 문화권과는 상이한 동이(東夷)문화권의 유적이 동북공정에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신석기시대의 토기의 발달과정을 보면 중국 서쪽의 양서문화나 중원의 용산 문화들은 동쪽의 동의족에 속한 홍산 문화권과는 서로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굴토기에서 발견한다. 우리 고대역사 속에 상고사의 실체가 홍산 문화의 발원지인 요동반도 위에서 부터 내몽고자치주와 동북 삼성의 광활한 만주벌판 일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근자에 와서 중국 일부학자들이 발해와 고구려까지 자기들의 변방국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내놓으면서 북조선이 망하면 그들이 접수하려는 마각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언어와 풍습과 역사가 다른 국가들인 신강성의 위구르민족이나 티베트와 내몽고, 그리고 위난성의 소수민족들을 야금야금 침탈하고 정복하고 역사를 말살 왜곡하여 통합 지배하였다. 그런 야욕을 우리는 현재도, 아니 지나온 과서사를 통하여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중국을 여행하고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며 또한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최단 박사 : 최단치과 원장]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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