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안양 사람들을 만나고 만안교를 세우다 2편
강광수 기자 | 입력 : 2016/10/06 [07:47]
○ 7차 거둥길과 안양 사람들 1796년의 음력 1월 거둥길과 다음해인 1797년의 8차 거둥길은 안양의 사람들과 더욱 적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즉 거둥길 야간 행차를 대비하여 임시로 쓰는 군인, 즉 고군(雇軍)에 대하여 지역의 백성중 착실하고 위엄있는자를 선발하여 거둥길에 횟불을 들고 서게하였다.
평균 15보당 등 또는 횟불을 들며 출궁시 고가는 7전, 환궁시 고가는 3전을 지불하였다. 또한 시흥행궁과 안양행궁의 거둥길에 좌․우등은 672개로 이중 300명은 시흥에서 372명은 과천에서 책임지게 하였다. 그리고 안양에서 고천의 사근참 까지는 6,150보에 17리로 30보 간격에 등이 820개가 들어갔다. ○ 안양주필소 쉬며 민정을 살피고 시를 짓다. 정조는 1797년의 8차 원행 또한 시흥로의 노정길을 택하여 원행을 다녀온다. 이때 정조는 안양행궁에 도착, 신하들에게 점심을 베풀며 안양 주필소의 식목이 너무 엉성함을 탓하고는 이번 봄에 각별히 신경써 나무를 관리할 것을 하교한다.
또한 지방관 김사의로부터 안양천 근처의 충훈부 농지에 보를 쌓아 20여 두락이 개간되고 이로 인해 부근 거민의 수가 겨우 11호였으나 지금은 31호로 늘어 토지 개간에 따른 양민의 증가등에 효과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이와함께 정조는 안양에 사는 백성에 대한 노역은 물론 군포천교와 염불교가 물이 넘쳐 쓸려가는 내용 등을 세세하게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린다. 특히 하교한 사항에 대하여는 반드시 추후에 결과를 보고토록 하므로 철저한 민정파악과 더불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상명하복의 통치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거둥길에서 살펴본 백성의 애환과 고통을 한편의 시로 남기고 과천의 동헌에 걸게하였다.
남충의 부로들 나를 맞기에 익숙하여라 / 구 년 동안에 이 행차가 그 몇 번이던고 임금의 행차 보고 다들 기뻐는 한다만 / 민생 구제할 인술이 없는 게 부끄럽구나 ○ 마지막 거둥길, 안양주필소 이전과 만안교의 수난 정조의 재위 24년이며 춘추 49세를 맞는 1800년은 세자 순조의 나이가 11살로 관례와 책봉례가 2월 2일 창경궁 집복헌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따라서 1월 16일 원행을 떠나 17일 전배시 정조는 세자의 책봉례를 고하며 부친의 세자 시절을 떠올리고는 큰 소리로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환궁은 2월 18일로 정조가 안양주필소를 지날 때 부근 민가에서 불이나 급히 군사를 보내어 불을 끄게 한 후 시흥행궁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4달 후인 6월 28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정조는 만성적으로 앓던 피부병에 의하여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를 한다.
『정조실록』에는 “햇빛이 어른거리며 삼각산이 울었고 앞서 양주와 장단 고을에서 잘 자라던 벼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 상복을 입은 벼)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의 승하 이후 안양주필소는 1868년 3월 16일 고종의 명에 의하여 마침내 헐리게 된다. 그 이유는 시흥현 관아의 건물 중수를 위하여 안양리 행궁을 헐어 자재를 이용토록 하는 것으로 아마도 1858년(철종 9) 1월 13일의 시흥행궁 화재와 관련한 연관성을 추정케 하기도 한다.
이로써 시흥로의 노정길에서 정조를 맞이하던 안양주필소는 사라지며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은 작은 표석많이 행궁지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함께 만안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하천의 교량이 아닌 도로의 일부로만 존재하게된다. 즉, 1905년부터 1979년 12월까지 홍예석 내부는 흙이 쌓여 있으며 외부는 콘크리트와 콜타르로 포장되어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 8월 현위치로 이전, 복원됨으로 비로소 교량으로 자신의 역할을 되찾은 만안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조선의 27대 왕중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회자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시대적 사상과 배경은 큰 차이가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 건국 이후 국왕과 신하가 한몸이 되어 정국을 쇄신하고 국가를 안정화하는데 있어 일체적인 국정 체제를 갖춘 세종시대에 비하여 조선 후기의 시대사적 배경은 변혁기였고 갈등에 시기였으며 성리학에 의한 왕권 중심의 유교 철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중에는 투철한 지도자의 자질과 함께 탕평책과 같은 균등정책, 적극적인 애민사상의 백성관, 문화의 시대를 전개 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애민사상과 함께 교육과 경제, 과학, 예술의 등의 업적은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로 부르는 것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안양의 능행로 개설 역시 단순히 원행길이 아닌 영민한 정조의 개혁의지와 이에 따른 강력한 왕권의 실천속에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던 당시의 상황과 의미를 잘 간직하고 있다. 다시말해 안양 거둥길에서 살펴보듯 탁월한 지도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되 진정한 소통과 위민의 통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김 지석 문화역사 칼럼리스트 (안양시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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