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정조(正祖, 1776~1800 재위)는 역대 어느 왕보다 궁궐 밖 행차가 많았으며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참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花山으로 이장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하는데 그 첫 번째가 1789년에 양주 배봉산에 모셔진 부친의 묘소 영우원 천봉에 따른 배례이며 이후 열두번은 현륭원 전배에 따른 능행이였다. 정조의 능행 거둥길은 초기에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안양의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1795년 6차원행 부터는 시흥과 안양의 석수동을 거쳐 구군포 사거리를 지나는 시흥로를 이용하였다. 시흥로의 개설은 조선 후기 시흥현에 속하던 안양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된다. ○ 정조대왕 안양 사람들을 만나다 정조 17년인 1793년은 현륭원의 4차 원행으로 과천로인 인덕원을 지나는 거둥길이였다. 음력 1월 12일 창덕궁을 출발한 원행길에서 인덕원 들녘을 지나며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지역의 현안 사항과 민심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고 위로와 격려를 준 것으로 추정되는 안양 사람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 어머니와 말방울을 울리며 만안교를 건너다. 시흥로 개설후 첫 원행인 1795년 6차 원행은 다른해에 비하여 매우 특별하였다. 우선 정조가 즉위 20년을 맞는 해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윤2월 13일 화성행궁내 봉수당에서 성대하게 개최키로 한 뜻깊은 날이었다. ○ 만안교의 완공과 인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다. 정조가 완공된 만안교를 건너게 된 것은 1796년의 7차 원행이었다. 만안교(萬安橋)는 1795년(정조 19)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서유방이 3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해 9월에 완성한 돌다리로 비문에는 만안교라는 이름을 정조가 하사했다는 것과 다리의 완공으로 인하여“ 은혜가 만백성에 미치니 마음놓고 건넘에 환성을 울리고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다.”하여 교량 명칭에 대한 정조의 애민정신과 치세(治世)의식을 읽을 수 있다. @ 김 지석 문화역사 칼럼리스트 (안양시 문화관광과)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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