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에 있는‘녹우당(고산 윤선도의 생가)과 보길도는 내가 꼭 가보고 싶어 한 곳 중의 하나이다. 그곳은 고산 윤선도의 문학과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장이며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해남과 보길도 여행이다. 몇 번이고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 때 마다 이런 사정 저런 이유로 기획이 무산 되었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청승맞게 혼자 덜렁 떠나기란 싱겁고 어려운 일이다. 좋은 곳일수록 가족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떠나 같이 고적을 답사하고 경치를 구경하고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들을 먹고 노닥거려야 여행의 맛이 배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왕이면 남도의 벚꽃, 진달래 피는 4월 중순쯤 떠났으면 좋으련만 서로 사정이 여의치 못해 봄철을 놓치고 여름도 그냥 보내고 올해에도 가을의 문턱에 들어와서야 가까운 친지인 장 회장과 다녀올 수 있었다. 그 분에게서 10월 16일 해남에서 제9회 고산문학 축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가할 용의가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 확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다. 서울에서 문인들 200여명이 관광버스 3대로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광진문협에서는 우리 동료 3명이 가고 차편도 좋다고 한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문인들의 회비가 1인당 3만원인데 자고 먹는 제반 경비를 전적으로 후원회에서 부담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싶었다. 올라 올 때에도 다시 그 차편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다. 출발지인 서초 구민회관 앞까지 모셔다 준다는 것이다.
그러고 아는 분들도 있으니 가고 싶으면 16일 아침 서초구 구민회관에서 오전 9시30분에 출발이니 그쪽으로 나오라는 전갈이다. 간단한 차비를 하고 아침 일직 광나루에서 출발하여 구민회관으로 갔다. 나가보니 아는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꼭 어릴 때 수학 여행가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보길도를 향하다
남도로 가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차창에 흐르는 가을의 경관이 마음을 끝없이 깊은 추색으로 물들게 했다.
'아, 잘 떠나 왔구나' 하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이 가을 문학기행을 되새겨 감사했다. 불감청 고소원이 이루어진 것에 스스로 신이 난다.
몇 시간을 달려 나주평야를 벗어나 영암 들 녘에 다다르니 차창에 월출산의 웅장한 기봉들이 춤추듯 어른거린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월출산, 과연 영산임에 틀림없다.
이곳 기봉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탄성과 함께 가수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의 구성진 노래 소리가 나의 뇌리에 휘돈다. '월출산 천황봉에 달이 뜬다. 달이 뜬다…의 가사가 저절로 입속에서 흥얼거려진다.
오후 4시에 해남군청에 도착했다.
문화예술회관에서 주최하는 일정에 들어갔다. 이 행사를 끝내고 다음날 보길도에 가는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예정은 없고‘녹우당’과 땅 끝 마을 전망대 관광뿐이 계획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시상식을 마치면 저녁때 상경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이곳 문학행사에 들러리 신세 격이 된 것이다. 허망한 기분이 든다.
어쩐지 1박 2일에 3만원이라는 경비로 된다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 어려운 나들이로 이곳까지 와서 보길도를 못보고 간다고 생각하니 낙심천만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고향이라는 광진문협 김 시인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지금 땅끝마을에 갈수만 있다면 보길도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보길도행 막배가 5시 30분에 있으니 보길도에서 자고 아침 일찍 유명한 자갈밭 예송리 해수욕장을 보고 세연정을 구경한 뒤 다시 배 타고 나와 이곳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일행과 합류하면 된다는 기발한 착상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살며시 행사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땅끝마을로 갔다.
우리나라 최남단, 육지로는 더 갈 수 없는 상징속의 토말(土末), 감회어린 표석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울에서 너무나 먼 거리, 우리 나이로는 두 번 다시 못 올 것 같아 김 시인의 뒤를 따랐다.
내가 생각하여도 꼭 어릴 때 개구쟁이 같은 짓에 혼자 실소했다. 10분전에 도착해서 5시 30분의 막배에 올랐다.
예송리의 일출, 우리의 희망이 되다
황혼의 뱃전에 금빛 파도가 부서지고 상쾌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애무한다. 이 얼마만인 행운인가. 꽉 막히고 답답하고 찌든 마음을 넓은 바다에 띠워 보냈다. 그 순간에 나는 갈매기가 된다.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상쾌함에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가 입안에서 뱅뱅 돈다.
보길도까지는 하루 8편의 배가 있다. 요즈음은 보길도와 노화읍을 잇는 다리가 7년 공사 끝에 개통이 되어 땅 끝에서 보길도까지 1시간 뱃길이 보길 대교로 가면 30분으로 단축 된다고 한다.
노화도에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어두움이 깔린 보길 대교를 지나 우선 동쪽 끝인 예송리 해수욕장 앞의 콘도에서 여장을 풀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김 시인과 함께 예송리 해수욕장을 산책했다.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고 밀려오는 잔파도가 자갈을 굴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이곳 동쪽 수평선에 벌어지는 일출의 장관에 우리의 거름을 멈추게 한다.
일출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솟아라! 붉은 해야 솟아라! 우리의 가슴에 희망을 주고 어두움을 걷어가옵소서' 소원을 빈다. 아침 해가 서서히 그 윤각을 떠올리고 주변의 어두움이 사라져 간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의 한라산이 이곳에서 보인다고 하니 정말 땅 끝에서 땅 끝으로 온 것 같았다.
다시 콘도에 돌아와 짐을 챙기고 택시를 불러 이곳에서 서쪽에 있어 차로 10분 거리가 되는 부용동의 세연정(洗然亭)으로 갔다. 너무 일러 개관하지 않고 있어 옆 초등학교 교정을 통하여 세연정 안으로 들어갔다.
고산 윤선도의 향기를 느끼다
옛날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이 그 나이 51세 때 왕(선조)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가복(家僕)을 이끌고 제주도로 가는 도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을 발견하고 그 섬에 반하여 터를 잡았는데 바로 그 섬이 보길도 부용 동(芙蓉洞)이었다 한다.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 봉을 주봉으로 하고 높고 낮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듯 와서 보니 과연 그 연유를 알 것 만 같은 섬의 수려한 풍광에 수긍이 간다.
이곳 낙선재에서 생을 마치기까지 우리 국문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고 저 유명한‘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오우가' 등 자연을 노래한, 많은 주옥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그의 해박한 학문과 풍류가 이곳의 풍광과 함께 어우러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문학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상이 물려준 많은 재산으로 세연 정, 무인 당 ,곡수 당 등의 건물을 짓고 인공과 자연을 잘 조화시켜 전통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이 정원의 호사스러움이 해남 윤 씨의 재력을 짐작케 한다.
고산의 호탕한 성품과 풍류가 만들어낸 조선 최고의 정원이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세연지와 회수 담)을 상세히 살펴보면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중간에 판석 보 (板石洑)가 있다.
물이 흘러들어와 구멍으로 흐르나 많은 양의 물이 들어올 때는 판석위로 흘러 마치 인공폭포처럼 꾸며 놓았다. 세연 정은 연못 가운데에 있고 특이하게 정자 바닥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데 이것은 처음 보는 형태이다.
이토록 섬세하게 정성을 다했는지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을 금할 길 없었다. 이런 곳에 눌러 앉아 세상을 등지고 지상낙원의 자기 왕국을 꾸미고 자연을 벗 삼아 풍악과 기생들과 함께 세월을 노래하고 보냈으니 가히 유토피아가 따로 없지 않은가.
신발을 벗고 세연 정에 올라보니 보길도가 눈앞에 다가온다. 동양화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지금은 주인 잃은 텅 빈 정자엔 옛날의 영화는 간곳이 없고 그의 꿈만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을 뿐 이곳을 찾은 나그네 김 시인과 나만이 그 멋에 흠뻑 취해 있다.
나는 연못을 향하여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춘사(春詞)1의 한 구절을 입속으로 불러본다.
봄노래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이곳에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지은 것이 그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의 호남이 낳은 위대한 대시인이며 시조문학에 금자탑을 쌓았고 우리 국어의 아름다움을 한껏 갈고 닦아 민족문화를 빛냈다.
그렇다고 해서 격변기의 고산이 이렇게 자기왕국을 만들어 놓고 신선같이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몇 차례나 나라를 위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나 당쟁으로 물러나 유배와 출사와 은둔을 거듭하다가 끝내 이곳에서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오래전부터 한국의 전통정원을 보고 싶거든 보길도의 윤선도원림을 보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양식인 윤선도원림에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삶이 녹아 숨 쉬고 있다. 한국의 정원은 시대에 따라 서울을 위시하여 각 도마다 지역적인 특색과 전통, 생활 풍습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으나 그래도 이곳처럼 조선시대 선비의 멋과 맛이 훌륭하게 잘 보존 되여 있는 곳이 달리 없는가 싶다.
그동안 외국여행을 많이 다녔고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특색을 지닌 전통정원을 보았다. 가까운 일본의 3대정원이나 중국의 정통정원, 구라파 각 나라의 특색 있는 정원들과 캐나다가 자랑하는 부차드 가든 이라든지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는 정원들을 구경하였지만 막상 우리나라 진수의 전통정원을 이제야 볼 수 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럽다.
해남을 가슴에 담고 서울을 향하다
이곳에 와 보니 우리 전통정원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조선의 멋과 향을 가슴가득 담고 몇 번이고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참을 구경하고 노화읍 선착장으로 가 10시 30분의 배를 타고 땅 끝 마을에 왔다.
땅 끝 마을 전망대의 에스커레이타를 타고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국립해양공원인 다도해가 눈 아래에 파노라마처럼 깔려있다.
전망대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구경하고 있으니 서울에서 같이 왔던 일행들이 올라온다. 장 회장이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기고 김 시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렸다. 그곳을 나와 고산 윤선도의 생가 녹우 당을 구경했다.
과연 호남 제일의 부호답게 고택이 크고 넓다. 고산 유물관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구경하고 고산‘어부사시사’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우리는 해남예술의 전당에서 시상식에 참석한 뒤 6시 30분에 어제 타고 온 버스 올랐다. 보길도를 다녀온 기쁨이 흐뭇했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최 단
최단치과 원장.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 신당동 소재 최단치과의원 원장으로 국제펜클럽 한
국문인협회 회원이며 고미술·골동품에 조예가 깊다. 저서로는 시집『미선나무』와『사진과 함께 하는 나의 세계문화기행시』등이 있다. www.choid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