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남학생을 부모가 진료실에 데려왔다. 그럴 아이가 전혀 아닌데 최근에 두 번이나 가출을 해서 그 이유를 알아보니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가 자기를 괴롭혀서 그 아이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어 그랬다고 했다. 3학년으로 올라와서 학교 성적도 많이 떨어지고 집에서도 전과 달리 신경질을 많이 부리며 불안, 초조해보일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에게도 자기를 괴롭히는 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않아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남 2녀의 외아들인 이 아이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는데 서울생활에 적응도 잘했고, 친구관계도 원만했으며, 다소 놀기를 좋아했고, 나이에 비해 좀 어린 점이 있긴 했지만 별 문제가 없는 학생이었다. 괴롭히는 아이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니 약 1년 6개월 전부터 괴롭힘을 당했는데 반 아이들이 아무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괴롭혔다고 했다. 근처 산에 둘이만 가서 심하게 맞기도 했고 학교에서도 아무도 없을 때 주로 맞았다. 만약 가족이나 학교에 그 사실을 알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들었다. 보복이 두려워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부모에게도 알려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더 괴로울 것만 같아 계속 당하다가 도저히 못 견디게 되어 최근에 가출하게 된 것이다. 처음 상담할 당시 이 환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학생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한 공포심을 가졌다. 이 경우 치료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해자 Z학생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Z학생과 1년 6개월 동안 지내오면서 나쁜 영향을 받아 예전과 다르게 변한 이 학생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이 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빛이 날카롭고, 껄렁껄렁하고 비행청소년 같은 말투와 행동을 했다. 처음에 이 환자의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 진정제를 쓰면서 적극적으로 안심을 시켰고, 부모에게도 애가 안심할 수 있게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다시는 Z학생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 다행히 같은 반 아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Z학생을 소외시키고 이 아이를 도와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학생 스스로도 Z학생과 같이 다니면서 그 아이와 비슷하게 시비를 걸고, 남을 때리고, 돈도 뺏고, 신경질을 부리고, 다른 애들 앞에서 폼을 잡고 하는 것을 문제 있다고 자각했고, 꾸준한 상담을 통해 많이 고쳐졌다. Z학생을 만나기 전의 천진난만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여 많이 좋아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을 싫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꼭 닮게 되는 경우가 있다. 술주정이 심하여 어머니를 구타하고 자식을 못살게 구는 아버지를 둔 아들이 크면 그 아버지 같은 술주정뱅이가 되는 경우나, 바람을 많이 피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들이 바람둥이가 되는 경우, 혹은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시집살이를 고되게 시킨다든지, 또는 부하직원을 심하게 다루는 상사 밑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이 윗사람이 되면 자기의 부하직원을 옛날에 자기가 당했던 방법으로 다루는 경우가 그러한 예다. 내가 치료했던 한 여자환자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기가 학교에 갔다 오면 현관에서 옷을 다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오게 했는데, 그것이 싫어 자기는 커서 절대로 어머니처럼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자기가 커서 어머니가 되어 자기 딸에게 그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 왜 싫어하면서 닮게 될까 안 그러겠다고 맹세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왜 그렇게 되어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모두 다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은 알콜중독자인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고 훌륭하게 컸다. 또 어떤 사람은 술 먹는 아버지가 싫어 술을 평생 한 방울도 입에 안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과 닮느냐 아니냐는 개인마다 갖고 있는 성격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주로 자기중심이 없고 주체성이 부족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대상에 대한 심한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느끼는 경우에 이런 현상이 잘 나타난다. 이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과 닮게 되는 것을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라고 한다. 귀신이 무서워 밤에 밖을 못나가던 꼬마애가 하루는 깜깜한 밖을 잘 돌아다녔다. 그래서 이제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제 무섭지 않다. 내가 귀신이라고 생각하고부터는 무섭지 않다’라고 했다. 이것은 ‘공격자와의 동일시’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된다. 나를 괴롭히고 겁먹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 있을 때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내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무섭고 공포심이 생긴다. 이럴 때 공포심, 불안을 없애는 길은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두려운 대상과 동일하게 될 때 거부감도, 공포심도 없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당사자가 모르는 사이에 닮게 된다. 닮게 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공격자에게 당했다는 것은 심한 자존심의 손상이기 때문에 자기 또한 공격자의 위치에 서서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그렇게 되기도 한다. 앞에 말한 이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공격자와의 동일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주체성을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하면 공격자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없앨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를 잃고 공격자와 동일시되어 자기가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회적 악순환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전현수 박사] <저작권자 ⓒ 뉴스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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