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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왕비와 화가가 남긴 아름다운 유방왕비와 화가가 남긴 아름다운 유방

마리 앙투아네트 유방을 본떠 잔으로 만들어

엠디저널 | 기사입력 2013/12/24 [06:30]

[Painting] 왕비와 화가가 남긴 아름다운 유방왕비와 화가가 남긴 아름다운 유방

마리 앙투아네트 유방을 본떠 잔으로 만들어
엠디저널 | 입력 : 2013/12/24 [06:30]

인간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성적 상징 기관이 볼기에서 유방으로 옮겨졌다. 즉 인간의 조상이라는 유인원의 경우는 성기 양측의 볼기가 성적 상징으로 뒤에서 오는 수컷을 유인하는 성적 장치의 역할을 했던 것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방 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여성 유방의 대부분이 지방조직과 유선(乳腺) 조직으로 구성되며 모유를 분비하는 한편 유두(乳頭)와 유륜(乳輪)에는 성감대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에서만 나타나며 다른 동물에는 없다. 그래서 여성들은 유방을 가리고 이를 보이는데 수치를 느끼게되었다. 한때는 여성의 미를 유방으로 결정하는 시절도 있었으며 이때부터 여성들은 아름다운 유방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왕비의 유방 모형과 유명한 화가가 그린 유방의 그림이 있어 이를 보면서 그 내막을 살펴보기로 한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가 루이16세의 왕비로 간택되어 베르사유궁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14세 때이며 그의 남편은 황태자로 15세 때였다. 그녀는 18세에 왕비가 되었고 21세에 임신할 때까지 7년 동안 루이16세는 몸의 병 때문에 왕비를 처녀의 몸으로 그대로 있게 했다.
물론 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처녀로 지내게 했던 것이 나이 어린 왕비의 정신적인 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된다. 왕비는 무료한 생활에 한계를 느껴 쾌락을 얻기 위해 밤이면 마차를 몰고 젊은 족속들과 어울려 극장과 도박장을 출입하기 시작했고, 이에 싫증을 느끼고는 보석과 값진 장신구를 사들이는데 열중했다. 나중에는 1년에 무려 100벌의 옷을 만들게 했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새로운 장신구에도 눈을 돌리는가 하면 연극, 경마, 무도회를 매일 밤 열고, 베르사유 궁전 안에 "꿈의 궁전"이라는 작은 별장을 짓고 매일 밤 친구들과 고관대작의 부인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열었다.

당시 귀부인들 최대의 관심사는 누구의 유방이 가장 아름다운가에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모이면 서로의 유방을 겨루는 "유방 콘테스트"를 열곤 했는데 1위는 언제나 앙투아네트 왕비가 독차지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길은 이렇게 새로운 쾌락을 발굴하는 길이었는데 루이16세는 남성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어 부인 옆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의 낭비와 사치를 방관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오빠인 요셉2세는 매우 걱정이 되어 빈에서 일부러 파리로 와서 루이16세를 설득해 외과수술을 받게 했으며 그 결과 사나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비로소 결혼 7년만에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으며 그 다음날 왕비는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사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루이16세의 병이 고쳐짐에 따라 부인과의 결혼생활도 원만해졌고 왕비는 임신이 되었다. 그러나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은 점점 더 심해만 갔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단지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만이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의 원인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상 문제 혹은 어려서부터의 엄격한 종교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여튼 그녀는 혁명 전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향락생활을 주도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혁명 세력에서는 왕비를 "적자부인(赤子婦人)"이라고 비난했고 혁명이 성공되자 왕비를 단두대에 올려놓고 처형했던 것이다.

왕비가 남긴 유방 잔

앙투아네트 왕비는 비록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것이 있다면 그녀의 유방이다. 즉 그녀는 베르사유 궁내에 "꿈의 궁전"이라는 별장을 지어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다. 건물은 작았지만 여기엔 가장 프랑스적인 취미를 살린 매혹적인 로코코 예술의 진수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영향을 받은 왕비는 낙농장과 젖 짜는 여자, 어린 양으로 가득 채우고 환상적인 전원생활을 누렸다. 그러면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세브레라는 제작자에게 두 개의 도자기 잔을 한 쌍으로 하는 완벽한 유방모양의 잔을 만들게 했다. 당시 "꿈의 궁전"에 모인 귀부인들과 벌인 유방콘테스트를 해서 언제나 자기가 1위를 하자 자기의 유방 미의 영광을 길이 남기기 위해 석고로 유방을 캐스트해 유방의 잔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유방의 잔은 앙투아네트가 결혼하고 7년 간의 처녀생활을 할 때 욕구불만이 최고도에 달했을 20세 무렵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반구형의 잔은 젖꼭지를 밑으로 한 유방을 세 마리의 산양의 머리로 잔을 떠받들고 있는데 수 산양은 남성 욕망의 심벌로 이를 본 프로이드 박사는 처녀처(處女妻)의 욕구불만이 잘 나타나 있다고 평했다고 한다.

이 유방 잔의 모양은 상당히 예쁜 것으로 매우 건강하고 혈기가 넘치는 유방으로 표현되었는데 특히 유두부의 표현은 의학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의 성 반응을 연구한 미국의 마스터즈 박사는 여성이 극치감을 느낄 때, 전신적인 반응과 더불어 유방에도 변화가 오는데 우선 유륜이 수축되면서 마치 휴지를 구겨놓은 듯 우글쭈글해지고 충혈이 오며 충혈이 극도에 달하면 유륜이 자적색(紫赤色)으로 변하고 유두는 돌출되면서 발기하고 경화된다고 했다. 즉 이러한 변화는 유방 밑에 있는 윤상((輪狀)의 불수의근(不隨意筋)이 성적인 흥분으로 수축되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이런 변화로 아직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유방은 원래의 크기의 1/4~1/5 정도는 더 커진다는 것이다.

앙투아네트의 유방 모양의 잔에는 이런 것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유륜과 유두부는 상당히 유사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마스터즈 박사의 여성이 극치에 달했을 때의 유방이 그대로 표현된 그림이 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그린 "파도와 여인"(1868)을 보면 파도가 잔잔히 일고 있는 물 속에 여인이 양쪽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어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유방이 뚜렷이 표현되었는데 유륜의 수축충혈, 유두의 돌출, 유방 전체의 팽만 등은 마치 마스터즈 박사가 보고한 유방의 변화와 일치된다.

쿠르베라는 화가는 사실주의 화가로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화가이며 자기가 보지 못한 것은 결코 그리지 않았던 화가이다. 그래서 그는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미녀의 그림은 그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고 보면 그림의 모델은 상당한 성적인 흥분의 절정에 달해 있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의 유방은 마치 앙투아네트의 유방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듯 하여 유방 잔의 실물을 보는 듯 하다.

그림에 대한 설명
그림 1. 펠리스 르콩트 작 "앙투아네트 왕비의 흉상" 1783, 베르사유 박물관 소장
그림 2. 세부레 작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한 도자기" 랑부에 낙농장 소장
그림 3. 쿠르베 작 "파도와 여인" 186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문국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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